해남을 둘러본 후 월출산을 바라보며 강진으로 향한다. 강진하면 떠오르는 것은 유홍준 교수의 다산초당과 백련사로 이어지는 남도답사 일번지 그렇지만 이것말고도 많은 문화유산들이 강진땅에 있다. 우리가 처음 찾은 곳은 강진 무위사. 유명해지기 전까지만 해도 무위사는 정말 호젓하고 조용한 사찰이었다. 찾는 사람이 몇 이나 있었을까? 조용한 사찰 안에는 버드나무가 휘날리고 있었고, 늙은 백구 한마리가 찾아오는 객(客)은 아랑곳하지 않고 극락보전 앞에 누워있곤 했다.

하지만 무위사가 너무 유명해져 버려 이젠 그런 모습도 볼 수 없다. 항상 사찰을 가면 드는 생각이지만, 유명해지고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면 예전의 호젓함은 없어져버리고, 여기저기 건물들이 들어서 예전의 멋을 잃어버린다. 무위사도 마찬가지로 예전의 호젓함과 멋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다. 무위사에 가면 유명한 것은 극락보전과 극락보전 후불벽화 뒤에 그려진 수월관음도이다.

극락보전은 그리 크지도 않은 아담한 건물이지만 단아한 맛배지붕과 공포들이 우리 건축의 멋을 잘 함축하고 있는 건물이다. 극락보전에는 많은 벽화들이 있었는데, 보수공사시 떼어내 벽화보존각에 전시해오다 요즈음 새로운 건물을 지어 벽화를 전시할 준비를 하고 있다. 무위사 후불벽화 뒤로 돌아가면 버드나무와 정병을 들고 물 위에 있는 관음도를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뒤에 관음도가 그려져 있는지 모르고 극락보전만 보고 간다.

극락보전을 오면 극락보전 왼쪽으로 비가 하나 서 있다. 선각대사 편광탑. 이것은 고려시대 승려인 형미의 부도비이다. 그런데 어디를 찾아봐도 형미의 부도는 찾을 수 없다. 그것은 형미의 부도가 개경 오관산 태안사에 있기 때문이다. 원래 부도와 비는 함께 있어야 하지만 따로 있다. 쓸쓸히 혼자 있는 비는 오가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서 있다. 형미는 태조왕건에서 왕건을 비호하다 견훤에게 죽은 승려이다. 왕건은 형미의 도움으로 강진지역 호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는데, 왕건 사후 강진지역 호족들에 대한 정치지배력이 약해지자 다시금 강진 무위사에 형미의 비를 세워 강진 지역 호족들의 지지를 끌어들일 요량으로 세운것이다.

강진 무위사를 둘러보고 무위사 뒤쪽으로난 도로를 넘어가면 설록차 강진다원을 만날 수 있다. 보성만큼 넓게 펼쳐져 있지는 않지만, 몇 분동안의 녹차밭 드라이브는 강진을 찾은 사람들에게 숨겨둔 보물을 보여준 것처럼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한다.

녹차밭을 넘어 찾은 곳은 월남사지. 월남사지에는 특이한 탑이 하나 있다. 그 탑 덕분에 모전탑이다 그냥 탑이다 얘기가 많았지만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그냥 탑으로 지정이 되었다. 탑 주위에서는 아직도 사찰이 존재했을때 썼음직한 석재들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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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다녀온지 일주일이 지났다. 오랜만에 찾은 해남이지만 모든 것이 새롭게 만난것처럼 반가웠다.

일주일전의 기억을 살려 땅끝 마을 해남 답사기를 시작한다.

그동안 너무도 조용하게 살아와서 그런지, 해남답사를 준비하는 는 굉장히 두근거렸다.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떨리기까지 했다. 이번 답사는 오손도손하게 해남길을 걸으며, 많은 얘기들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11월 22일 토요일 오후, 광천동 버스터미널에서 향숙 누나를 만나 가볍게 요기를 하고, 이것저것 간식거리를 산 후 필구형의 차를 타고 해남으로 향했다. 토요일 오후의 햇빛은 해남으로 향하는 차의 창가를 비추며, 분주하게 우리를 따라왔다.

광목간 도로를 타고 광주시내를 벗어나 나주로 향하니 주위에 서 있던 건물들이 낮아지며 조금씩 들판이 시작된다. 가을걷이가 끝난 황량한 들판이지만 오늘따라 시원해 보인다. 광목간 도로에서 나주시내쪽으로 핸들을 돌려 들어간다. 영암을 거쳐 강진, 해남쪽으로 난 새로운 도로를 타기 위해서다. 아침 일찍 이 도로를 타면 멀리 아스라하게 구름에 쌓인 월출산을 보며 달릴 수 있고, 오후쯤에 도로를 타면 노을에 빨갛게 물든 월출산을 보며 달릴 수 있다. 쭉 뻗은 도로에서 모든 들판을 제압하고 우뚝 서 있는 기암절벽들이 예술이다.

열심히 도로를 달려 1시간 30분쯤 됐을까? 해남이 다왔음을 알리는 팻말이 우리를 반긴다. 해남 팻말이 보이는 도로를 타고 가기를 20분여 해남군청에 차를 세우고, 다른 일행들을 기다린다. 해남군청에는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소나무는 을묘왜변때 해남의 현감이었던 변협이 심은 것으로 인근고을들이 을묘왜변때 성을 못 지켰던 반면, 해남은 왜적에 맞서 성을 지켰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소나무다. 그래서 소나무의 이름도 守城松(수성송)이다. 그때 심은 소나무가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폭의 그림처럼 기울어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은 멋있다.

한 20분쯤 지났을까? 도착했다는 연락이 온다. 기분이 좋아 달려가다 길중간에서 서로를 얼싸 안았다. 얼굴은 아무도 안 변했지만, 마치 어디 변한곳이 없는가? 두리번 거리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웃기에 바쁘다. 군청 근처 식당에서 간단하게 저녁요기를 하고 숙소로 향한다. 이미 해는 졌지만, 밤이 시작됐지만 해남의 밤은 더욱더 칠흑같다.

밤을 뚫고 15분쯤 달렸을까? 우리의 숙소인 해남유스호스텔에 도착했다. 해남 대흥사 밑에 있는 유스호스텔에서 자고 내일 새벽쯤 대흥사에 올라갈 참이다. 조용한 산사의 새벽공기를 마실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나 서로의 얘기가 깊어지니, 새벽이 금방 올 것 같다.

잠깐 눈을 감은 것 같은데, 이미 새벽이 왔는가? 이것저것 꼼지락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흥사의 새벽공기를 마시러 가야 할 시간인가보다. 일어나서 간단하게 씻고 옷을 챙겨입는다. 새벽공기가 차가울 것 같다. 준비를 마치고 일행과 함께 차를 타고 대흥사로 향했다. 대흥사 입구는 걸어가면 산책길로 참 좋지만 새벽이라 주위에 보이는 것도 없고, 오늘의 일정이 빡빡한 관계로 차를 타고 대흥사 앞까지 들어갔다. 매표를 하고 입구쪽에서 5분만 걸어들어가면 대흥사 부도밭이 우리를 반긴다. 이곳에 서산대사의 부도가 있다는데 조금있다 날이 밝으면 찾아볼 요량이다.

우선 천불전을 찾았다. 새벽공기에 불을 밝힌 천불전이 우리를 굽어보고 있는 것 같다. 불빛에 천불전의 공포가 멋있다. 대흥사에서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많이 만나 볼 수 있다. 원교 이광사가 신지도로 유배를 갈 때 대흥사에 들려 써 주었다고 한다. 대웅보전 글씨도 원교 이광사의 글씨인데, 이 편액은 추사 김정희와 얽힌 일화로 유명하다.

1840년 제주로 유배를 가던 추사 김정희가 대흥사에 주석하고 있던 벗이자, 동갑내기인 초의를 만나기 위해 들렀다. 추사는 초의에게 대웅보전의 글씨가 촌스럽다고 깎아내리며, 자신의 글씨로 편액을 하라고 말했다. 8년후 유배를 마치고 돌아가던 추사가 다시 대흥사에 들렀다. 그리고 다시 대웅보전의 편액을 원교 이광사의 글씨로 걸라고 한다. 8년여의 유배기간 동안 당당하여 오만하기까지 했던 추사의 자존심이 추사체의 완성으로 너그럽고 완벽한 멋으로 변했기 때문일까? 추사도 대흥사에 글씨를 남겼는데, 대웅보전 옆에 요사체에 걸려있는 무량수각 이라는 글씨이다. 힘있게 써 내려간 글씨가 추사선생의 글씨의 참 맛을 느끼게 한다.

남원 구역을 어느 정도 들러본 후 북원 구역으로 향했다. 북원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 들어가야 한다. 다리를 건너며 마주치는 건물이 침계루이다. 승주 송광사에도 침계루가 있는데, 침계루는 시내를 배고 누웠다는 뜻이다. 여느 현판의 뜻보다 시적인것 같다. 시내를 배고 누우면, 시냇물 소리에 저절로 깊은 잠에 빠질 것 같다.

대웅보전과 무량수각의 추사 글씨를 감상한 후 두륜산을 바라보았다. 마침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햇빛이 두륜산의 산록을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대둔사 답사를 마치고, 게장에 아침을 먹은 후 미황사로 향했다. 정말로 땅끝에 위치한 아름다운 절 미황사. 예전에도 한번 온적은 있지만, 마치 꿈속에서나 본 듯 아련한 기억만 있다. 달리기를 40여분, 미황사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오기 시작한다. 반도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기분이 묘하기까지 하다.

달마산 미황사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경덕왕 8년(749)에 돌로 만든 배 한척이 땅끝마을 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나 며칠동안이나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의조화상이 제자를 이끌고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했더니 그 배가 육지에 닿았다. 그런데 그 배안에는 금으로 만든 사람이 노를 잡고 있었고, 금으로 된 함과 검은 바위가 있었다. 금합에는 여러 종류의 불상, 불경과 탱화가 들어 있었고, 황소 한 마리가 검은 바위를 깨뜨리고 나왔다. 의조화상은 이를 이상히 여기고 잠들었다가 꿈속에 금인이 나타나서 그 소에 불상과 불공과 탱화를 싣고서 가는데로 따라가다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지으라는 꿈을 꾸었다. 의조화상은 꿈에서 깨어 그 소에 불상과 불공 탱화를 싣고 갔다. 소는 달마산 중턱에 이르러 크게 울더니 넘어져 일어나질 못했다. 그곳에 절을 짓고 황소에 가르침에 따랐다 하여, 아름다운 황색절이라는 의미로 '미황사' 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불교의 해로유입설을 생각해보게 하는 재미있는 전설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불교는 고구려 승려 도림에 의해 육로로 중국에서 전파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전설 뿐 아니라 영광 법성(法聖)포와 불갑사(佛甲寺)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법성은 풀이하면 불법의 성스러움이고 불갑사는 불이 으뜸이라는 소리이다.

달마산 미황사의 대웅보전에는 재미있는 것이 있다. 대웅보전의 주춧돌을 보면 게가 새겨져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작을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 미황사 대웅보전에서 볼 수 있었던 남해의 쪽빛 바다는 앞에 지어진 보제루 덕분에 가려서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미황사를 어느 정도 둘러보고 산길을 따라 미황사의 걸작 부도군들을 찾아갔다. 예전에는 작은 오솔길을 걸어가야 했는데, 이제는 길을 넓혀놓았다. 그 작은 오솔길을 걸으며 오른편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바다를 감상하는 것도 좋았는데, 길이 넓여지니 그런 맛도 없어지는 것 같다. 미황사의 부도군들에서도 재미있는 것을 찾을 수 있다. 오리며, 게며 여러가지 생물들이 새겨진 부도군들은 마치 어린애가 찰흙을 오물조물 빚어서 붙여놓은 것처럼 재미있는 모습들을 하고 있다.

미황사를 어느 정도 둘러본 후 녹우당으로 향했다. 해남윤씨의 종가인 녹우당은 고택 앞의 은행나무 잎이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모습이 비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효령대군의 스승이었던 고산 윤선도가 효령대군이 왕이 되면서 수원에 지워준 집을 뜯어다가 다시 지은 것이다. 녹우당에서 호젓한 햇볕을 즐기며 고택을 감상하는 것도 일품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을쯤에 온다면 바람에 날리는은행나무 잎을 보는 것도 일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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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 `향락` 산업 판친다
(::신촌등 유흥시설 불야성::)

대학가로 알려진 서울 신촌에 대학이 없다? 연대앞은 술집들로 휘황찬란한 ‘연세카바레’, 이화여대앞은 미용실이 죽 늘어선 ‘이화차밍스쿨’, 서강대앞은 분식집들만 눈에 띄는 ‘서강고등 학교’….

실제로 연세대 정문 앞에서는 세계에서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술 집이 영업을 하고 있으며, 이화여대 앞에는 140여개의 미용실과 각종 보세옷집들이 들어서 있다. 최근엔 서대문구가 이화여대앞 을 ‘미용특화거리’로 지정, 교수와 학생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 다.

이웃 홍대앞도 대학 분위기를 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 마 요즘은 미군 출입금지로 인해 사정이 많이 좋아졌지만 한동 안 홍대 앞 클럽에서는 일명 ‘도리도리(엑스터시)’등 마약류를 쉽게 구할 만큼 퇴폐적 분위기로 흐르기도 했다.

학구파들이 모인다는 서울대 부근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대입구 전철역 근처는 물론 신림사거리 등은 거대한 모텔촌 이다. 이밖에 건국대, 경희대, 성신여대 등 다른 대학들의 주변 에도 술집과 단란주점 등 유흥시설들이 대거 몰려 있다. 그나마 성균관대가 학교앞에서 각종 문화행사를 개최, 차츰 유흥가 이미 지에서 벗어나고 있다.

한국의 대학가에는 왜 유흥시설들이 밀집하는 걸까. 차분하고 학 구적인 외국 대학가의 모습이 우리 대학가에는 형성되지 않는 이 유는 뭘까. 이와 관련, ‘교육환경을 위한 교수모임’의 김혜숙 교수(이화여대)는 우리나라 대학가들이 유흥가가 되는 이유로 교 육환경을 보호하는 적절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점을 들 었다.

김 교수는 “시대에 뒤떨어진 현행 학교보건위생법으로는 교육환 경을 제대로 보호할 수 없다”며 “외국에서는 학교인근의 상업 적 개발이 엄격히 제한돼 있다”고 말했다.

일부 학생사이에서는 현재 우리의 대학가 모습은 ‘한국 대학생 들의 자화상’이란 자성론도 제기되고 있다. 일단 대학에 들어가 기만 하면 학문탐구나 자아개발보다는 놀고 마시고 꾸미는 데 치 중, 향락시설이 대학가로 몰리는데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연세대 이지현(21)씨는 “언제부턴가 신촌에 있던 책방들이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며 “학생들이 책방을 찾기 보다 술집 을 많이 찾으니 신촌일대가 유흥가로 뒤덮이는 것은 당연하다” 고 우려했다.

이화여대 김수지(22)씨는 “술집이나 미용실 등 이대앞 시설을 이용하는 고객의 70% 이상은 이대생들이 아닌 외지인들”이라며 “향락의 거리가 형성된 데에는 이대생들의 탓도 크지만 학교앞 시설에 대한 규제를 하지 않은 행정당국과 학교측의 책임이 더 크다”고 말했다.

/ 이혜운(이화여대) harukina@freechal.com
문화일보 2003.11.29(토) 10:20


대학가에 모여있는 향락산업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여러가지 말들이 있지만 일단 나의 의견은 학문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에게 학문이란 무엇이었는가? 학문이 과연 학문의 제 목적을 수행하고 있었는가? 나는 이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우리에게 학문은 배고픔을 달래주고 현실을 타개하는 것의 목적이었지, 결코 배우고 익히는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언제부터 우리에게 모두가 배워야 한다는 의식이 생긴것일까? 모두가 배워야 한다는 의식이 생긴 이후부터 우리의 학문은 원래의 목적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역사속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내 생각으로는 일제하에서 새로운 문물들이 들어오면서 조선인들 사이에도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사람들 사이에도 학문의 필요함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본다.

물론 이것에 대한 연구는 더 해봐야 겠지만, 사람들에게 모두가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학문은 학문의 본래 목적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모두에게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의식이 생긴것은 다르게 말하면 이 현실을 타개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실을 떠나 있는 배움을 위한 배움하고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모두에게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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