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과 혁신 : 생각을 뛰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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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다음(daum) 책에서 진행한 이벤트 <책 시사회>에서 제공된 책을 읽고 작성되었음.

혁신을 위한 6가지 법칙
몸을 움직이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다. 어디로든 가는 것이다. 몸이 움직이면 눈은 어떤 사물, 사람을 보게 되고 오감이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게 된다. 곧 이것은 경험이 되어 머리속에 축적된다. 노나카 이쿠지로의 <생각을 뛰게하라>는 혁신을 위해 동사적 사고를 주문한다.

노나카 교수가 제시하는 혁신을 위한 6가지 법칙은

실천적 삼단논법을 익힌다.
모든 경험과 지식을 엮는다.
행동하며 생각한다.
동사를 중심으로 사고한다.
보이지 않는 맥락을 간파한다.
우연을 필연화한다.
노나카 이쿠지로, 가스미 아키라 <생각을 뛰게하라> 271p

이다. 위의 법칙들은 모두 행동의 토대위에서 이루어지는 법칙들이다. “나는 00다”라는 단정적이고, 주어적인 표현보다는 “나는 ㅇㅇ가 된다”, “나는 ㅇㅇ를 한다” 같은 동사적인 표현을 통해 실행력과 실천력을 만들어 낸다.

우리 주위에는 동사적인 표현이 많다. 특히 어느 조직에나 있을 법한 구호를 유심히 살펴보면 동사적인 표현들이 많이 등장한다. 동사적인 표현들은 미래를 표현하고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상징한다. 외치는 것만으로도 웬지 모를 힘이 생긴다. 여기에 특별한 경험을 통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 지혜를 만들어내는 과정들을 살펴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조그마한 사실도 그냥 넘어가지 않으며, 일단 행동하고 본다는 것이다.

내가 학부과정을 마칠 즈음,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는 나에게 지도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일을 하든 일단 저질러 봐라. 일단 저질러진 일은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지 않겠니? 무엇을 하든 일단 발을 들여놓고 그 다음에 생각을 하든, 거기서 그만두는 것이 시도도 안해보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래서 나도 고민이 될 때면 일단 해본다. 저질러 봐야 경험도 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도 있고, 새로운 생각이 든다. 결국 행동하지 않으면 경험이 생기지 않고, 경험을 통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그 안에서 파생되는 지혜 또한 얻을 수 없다.

일단은 저질러 보는 것이다. 지금 당장…그 대신 경험을 쌓고, 그 경험을 이전에 쌓은 지식과 경험들과 합쳐 새로운 지식을 창출해낼 것이라는 동사적 사고는 잊지 말고…

* 내가 흐름출판으로 부터 받은 책은 정식출시전 교정을 위해 나온 책인것 같다. 시중에서 봐오던 책들에 비해 맞춤법이나 문장의 연결이 부드럽지 못한 부분이 많이 눈에 띄었다.

자기대면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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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떠오를 것이다. 의도 하지도 않았고, 생각을 해보자고 마음먹고 앉은 것도 아닌데, 어느 날인가 문득! 이렇게 사는게 맞나? 잘하고 있나? 아니면 잘 되고 있는건가?

누구나에게 필요한 공간
누구나에게 필요한 공간이다. 마치 잊고 있었던 것처럼. 남자들은 모두 하나씩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의식하고 있지는 않다. 내가 군복무를 할 때, 바로 위 선임이 이런 말을 했다.

왜 담배를 피우는지 알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빨아 드렸다, 후~ 하고 내 뱉쟎아. 그때 가슴이 시원해진다.
그래서 담배를 피는 거래…

그때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런데, 가끔씩 속이 답답하고 힘들때 담배를 한 가치씩 얻어 피웠다. 부대 막사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쪼그려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훅 내 뱉으면 가슴속에서 울컥함과 어딘지 모를 후련함이 함께 올라왔다.

남자들은 그 기분을 알 것이다. 그리고 이내 몽롱한 상태로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그리움 같은 것을 맞아들이기도 했고, 내일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겠다는 생각도 했고, 또 전역후에는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나에게는 무엇과도 바꾸기 힘든 정말 소중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어느날 문득 생각이 들 때
전역을 하고, 학부와 대학원을 마치고, 취직하고 또 회사를 서울로 옮기고 어느 날엔가 문득 정말 잘 하고 있는 것일까? 잘 살고 있는걸까? 하는 생각이 문득 찾아왔다. 어딘가 조용한 곳에 가서 벽이라도 보고 몰두를 하고 싶은데, 도저히 시간도 안 났고, 혼자 떠나기가 정말 힘들었다. 혼자 떠난다는 것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친하게 지내는 분이 지리산에 함께 가자고 했다. 흔쾌이 수락하고 새벽4시에 차를 몰고 내려가 지리산 둘레길 1코스르 마치고 왔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다음에도 혼자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후, 여름 휴가를 이용하여 제주 올레길을 다녀왔다. 두려움이 찾아왔다. 혼자 할 수 있을까? 갈 수 있을까? 그때 갑자기 회사에 무슨 일이 생겨서 취소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내일 아침 비행기 시간에 맞춰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함이 함께 찾아왔다. 이런 불안함이 결국엔 길을 걸을 만한 장비가 없는데…어쩌지? 하는 불안으로까지 번졌다. 그렇지만 이번엔 달랐다. 매일 생활하던 나의 조그만 방과, 서울이라는 공간을 훌쩍 이탈하고 싶은 생각이 더 컸다. 주섬주섬 필요한데로 챙기고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자기대면의 공간
제주로 떠나기전 이런 저런 코스를 찾아보다가 4코스를 맨 처음으로 걷기로 했다. 22.9km에 달하는 장거리 코스를 그것도 한 여름에 걷기로 한 건 무모하기도 했지만, 제주가 주는 매력에 그런 걱정은 들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제주는 나에게 특별한 공간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의 대부분을 제주에서 보냈고, 이후에도 몇 번씩 제주를 들락날락 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한반도 끝에 자리한 널직한 섬이지만 나에게는 특별하고 정든 공간이었다.

4코스 초입에서 올레길 안내소에 들어갔다. 안내소에 있던 삼촌(제주에서는 모르는 사람도 삼촌이라 부른다)이 이런 말을 했다.

4코스가 올레길 코스 중 가장 길지만, 어떤 고민이 있거나, 걱정하는게 있다면 이 코스를 다 걷고 나면 코스가 끝날 쯤에 그 고민이 풀릴겁니다.

그 말이 정답이었다. 땡볕이 내리쬐는 4코스를 혼자 걷자니, 이런 저런 잡동사니 같은 생각부터, 진지한 생각까지 섬안으로 파고드는 파도처럼 무수히 밀려왔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고민과 걱정거리들을 하나씩 하나씩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터벅터벅 걸어가며, 밀려드는 파도소리와 바람에 한동안 넋을 잃고 쉬기도 했다.

코스가 끝날 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민하고 걱정했던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해결되고, 점차 실마리가 보였다. 해결책은 이미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다.

자기대면의 공간이 주는 즐거움
회사에 끌려다니고, 일에 파묻히고, 사람에 힘들고, 삶이 힘들다면 자신을 위해 자기대면의 공간을 만들어 보길 권한다. 되도록이면 지금 살고 있는 공간을 벗어나서 멀리 있는 공간, 생소한 공간이 더 좋다. 그리고 혼자이면 더 좋다. 가톨릭에서는 ‘피정'(避靜)이라는 활동이 있다. 한자대로 해석하면 피해서 고요한 곳으로 간다는 뜻이다. 피해서 고요한 공간으로 혼자 찾아들면 복잡했던 것들이 스스로 자기 자리를 찾을 것이다.

아픔을 치유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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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영화 3편을 봤다. 비버(The Beaver), 웰 컴투 마이 하트(Welcome to the Rileys),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まほろ駅前多田便利軒)이다. 위의 영화들은 영화를 풀어가는 방식이 약간씩 틀리지만 공통적으로 아픔을 치유하는 법으로 ‘소통’을 내세우고 있다.

*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음.

우리는 모두 아프다.
위의 영화들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아프다. 모두 어떤 아픔들을 가슴에 품고 내색하지 않고,마치 평범한 것처럼 하루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왜 우리 모두는 아프다는 생각을 했을까?

현재의 우리의 상황을 보면 정말 녹록치 않은 삶이다. 대학을 졸업해도 직장 찾기란 하늘에 별 따기며, 직장을 얻고 어떻게 어떻게 결혼을 해도 집 사고, 얘 키우기가 무서울 정도로 힘들다. 이른바 3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 포기)가 나올만한 세상인 것이다.

과연 얼마나 녹록치 않은 삶인가? 모든 것은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고, 정부는 수도권 과밀화 방지정책은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 조차 의문이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은 갈수록 서울로 모이고 있다. 공부, 직장을 위해 좁디 좁은 땅떵이에서 얼기설기 살고 있지만, 오늘과 내일조차도 숨막히기는 매 한가지다.

가족의 해체, 1인이 살아가는 힘든 세상
가족은 이미 해체되었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지만 이 땅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각자가 뿔뿔히 흩어져 제 몫을 해야 살 수 있다. 결국 같이 살고, 같이 세상을 헤쳐나간다고 생각하지만 ‘홀로’ 인 것이다. 이미 ‘홀로’ 인 우리에게 대화와 소통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 다시 희망찬(?) 내일을 위해 오늘은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버(The Beaver)에서는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모든 것이 부족할 것 없는 가족의 모습이지만 가족 구성원 각자는 각자의 일들만으로도 바쁘다. 블랙(멜 깁슨)은 장난감 회사 사장, 메레디스(조디 포스터, 특이한 직업이지만 롤러코스터 설계자) 그리고 아들들은 각자의 생활에 모두 각자의 일들로 몰두하고 있다. 모두는 서로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정말 가족일까? 정말 행복할까?

웰 컴 투 마이 하트(Welcome to the Rileys)에서도 부부의 모습은 매 한가지다. 딸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더그와 로이스는 부부이지만 부부의 모습이 아니다. 이미 대화는 단절되었고, 하루하루가 그냥 하루하루 일 뿐이다.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 집에서는 위의 두 영화와는 약간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다다와 교텐이 가족을 통해 받은 아픔을 어떻게 치유해가는 가를 잔잔하게 따라간다.

아픔은 아픔으로, 그리고 소통으로
결론 부터 이야기하자면 ‘아픔이 아픔을 소통을 통해  치유’한다. 비버(The Beaver)에서 포터(안톤 옐친, 영화에서 멜 깁슨의 아들로 출연)는 노아(제니퍼 로렌스)와의 관계를 통해 그 사실을 깨닫는다. 아픔은 결국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웰컴 투 더 마이 하트(Welcome to the Rileys)에서는 말로리(크리스틴 슈튜어트)가 보일러를 고치고 있는 더그에게 라이터를 던지며 말한다.

“왜 아줌마 한테 딸이 죽은 이유가 아줌마 잘못이 아니라고 얘기 하지 않았어요!” 

더그는 그 이야기를 듣고, 느끼게 된다. 왜 이야기(대화, 소통)하지 않았을까? 그냥 내 아내가 딸의 죽음 때문에 아퍼하고 힘들어하니, 그대로 두자. 라고 생각하고 이야기는 하지 않았구나. 결국 더그와 로이스는 말로리 때문에 다시 화목하고 행복한 부부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 집에서는 조금 더 적극적인 치유의 모습이 나온다. 왜 다다는 심부름 집을 운영하고 있을까?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다다가 심부름 집을 운영하는 이유가 보인다. 물론, 주인공은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심부름 집을 운영한다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심부름 집을 운영하며, ‘하나’라는 치와와개와 원래 주인, 그리고 그 개를 키우는 술집 아가씨들, 그리고 양엄마와 같이 사는 아이, 그리고 또 양엄마와 같이 사는 야쿠자의 이야기를 통해 다다와 교텐은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게 된다.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돕고 소통하며 치유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픔을 치유하는 법
우리는 모두 아프다. 사실 직장에서든 어디에서든 즐겁고 행복하지도 않지만, 가면을 쓰고 즐거운 척, 행복한 척하고 있다. 어느 순간 왜 사는가? 는 물음이 떠오르는데, 그 물음이 가슴을 콕콕 찌르고 어딘지 모를 아픔을 선사한다. 그 아픔은 잠깐 동안은 잊어버리고, 밀어둘 수 있지만 그 만큼 자꾸 가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삶에 지쳐서 대화보다는 이해해주길 바라고, 소통보다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다.

우리가 아픔을 치유하는 방법은 어느덧 다가온 “왜 사는가?” 라는 물음을 가슴 속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게 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가족과, 나의 동료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이 아닐까? 아픔이 아픔을 소통을 통해 치유하므로…